의사가 병원에서 의사가운벗고 베드에 누운 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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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가 병원에서 의사가운벗고 베드에 누운 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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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짤-헉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짤 -의사가 병원에서 의사가운벗고 베드에 누운 썰-1번 이미지

1.

문득 자다가 배가 아팠다. 정확히는 배가 불편하고 열감이 있었다. 기억에 남았으니 분명 잠에서 깰 정도의 통증이었다. 어둠 속에서 생각했다. 자기 전에 라면과 탄산수를 먹고 에어컨을 틀고 자면 배가 아프군. 내 몸은 가끔 무리하면 아프단 말이야. 그런데 무리하지 않는 날이 있어야지. 시계가 새벽 세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오늘은 여섯 시에 기상해야 했다. 나는 에어컨을 끄고 배를 문지르며 다시 잠을 청했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나아질 것이다.

다행히 다시 잠이 들 수 있었다. 다섯 시에 한 번 깼으나 여섯 시 알람을 듣고 일어났다. 배가 여전히 불편했지만 심한 정도는 아니었다. 아침부터 충청북도 영동에서 강의 두 개가 연이어 예정되어 있었다. 버스나 KTX가 가지 않아서 무궁화를 타고 가야 했다. 침대에서 나와 짐을 챙겼다. 구름이 끼고 흐린 날씨였다. 서울역에서 라이스 버거와 아이스 커피 세트를 사서 기차에 탔다. 공기가 서늘했고 복통은 적당히 가라앉아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엄청난 비가 내렸다. 마중 나온 선생님은 영동에 이렇게 비가 많이 내리는 것을 처음 봤다고 했다. 배에 가스가 차 있는 것 같이 불편했다. 사람들 앞에 서는 강의가 연달아 예정되어 조금 더 불편할 것 같았다. 예의범절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었다. 참 민망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중학교에서 오전 강의를 마쳤다. 점심으로 근처 도서관 선생님들과 보리굴비 정식을 먹었다. "제가 밥을 참 잘 먹어서 세계테마기행을 또 촬영하러 갈 판입니다." 반찬의 가짓수가 많아 밥을 두 공기나 먹었다. 잠깐 틈을 내서 비를 뚫고 선생님과 커피숍에 갔다. 배가 불편해서 잠시 화장실을 찾았더니 나아졌다. 이제 두 번째 강의였다. 마치면 서울로 올라가서 쉴 수 있었다.

고등학교 강의에서는 열중한 탓인지 복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보건반 학생들이 강의를 잘 들어주었다. 마치고 비를 뚫으며 기차에 올랐다. 배가 묵직하고 불편했다. 이제 일을 마쳤으니 집에서 편하게 누우면 나아질 것이었다. 지하철과 마을버스를 갈아타고 집에 돌아왔다. 서울에는 비가 그쳐 있었다. 발을 씻고 편하게 누웠지만 배가 편하지 않았다. 가스가 나왔지만 속이 불편했다. 평소 진료실에서 내가 하던 설명을 생각했다. "뱃속에 100이 들어있는데 나온 게 30밖에 없다면 아직 70이 있는 겁니다. 안 불편한 게 아니에요 환자분." 아마도 가스성 장마비 같았다. 내 몸은 가끔 말썽을 일으킨다. 또 역시 탄산수와 라면과 에어컨과 지방 강연은 좋은 조합이 아니었다.

가스성 장마비에는 달리기가 도움이 되었다. 마침 며칠간 운동에 소홀한 참이었다. 칼로리도 소모할 겸 비 그친 한강으로 달려나갔다. 복통이 있어 전력으로 달리기가 어려웠다. 배 안의 가스가 넘실거리면서 같이 달리는 느낌이라 중간에 계속 쉬어야 했다. 그럼에도 일정 없이 마음 놓고 달리기를 하는 것은 드문 기회였다. 원래 전력 질주를 하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멈추고 싶은 유혹을 이겨내며 10킬로미터를 넘겼다. 기록을 체크하니 올해 가장 느린 페이스였다. 치료 목적이니까 나쁘지 않았다. 갈증이 나서 냉장고를 열었는데 하나 남은 폴라포와 탄산수가 보였다. 복통도 조금 가라앉았고 가스도 빠졌으니 먹어도 될 것 같았다. 샤워하는 중간중간 폴라포를 빨며 얼음잔에 담긴 탄산수를 마셨다. 대단히 시원했다. 하지만 망할 실수였다. 자리에 누우니 본격적으로 배가 아팠다.

"이놈의 탄산수가 문제구나. 어제도 마셔놓고 오늘도 먹다니. 정신 나갔나 봐." 이미 밤 11시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내일 당직 출근 전에 일정이 없어서 그래도 조금은 마음 편히 아플 수 있었다. 침대에 누워 기차에서 읽던 소설을 마저 읽었다. 오늘 읽기 시작한 두 권짜리 소설이었는데 복통을 잊어버릴 만큼 재미있었다. 탄산수 한 병 만큼의 가스를 제거하는 데 역량을 집중하며 책을 읽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소설을 다 읽고 말았다. 명작이었다. 하지만 서평을 기록하기에는 기운이 없었다. 오늘 이미 지방까지 다녀오고 달리기도 하지 않았는가. 더 이상 가치 있는 일은 못 할 것 같았다. 유튜브로 쓸모없는 영상을 보다가 두 시쯤 잠이 들었다. 다시 일어나자 두시 반이었다.

배가 심각하게 아팠다. 악성 가스가 존재감을 호소하는 것 같았다. 약이라도 먹어야 할 것 같았다. 편의점에 가려는데 바지 단추를 잠글 수가 없었다. 배가 눌리면 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적당히 바지를 걸치기만 한 채로 편의점에 가서 소화제를 사 왔다. 먹었더니 심정적으로만 나아졌다. 다시 유튜브로 쓸모없는 영상을 보면서 삼십 분마다 화장실에 가서 가진 것을 내놓으려 애썼다. 그때마다 시도가 의미 있게 성공했지만 좀처럼 편해지지 않았다. 집 근처 응급실에 가는 상상을 잠깐 해 보았다. 장에서 가스를 제거한다고 집어넣는 콧줄과 항문 튜브를 떠올리자 그냥 선택을 안 하기로 했다. 그래도 배가 아파 나 혼자 몰래 넣을 수 있다면 할 것 같은 심정이었다. 잠이 안 오니 근력운동을 한다고 푸쉬업을 20개씩 3세트를 했다. 복통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곧이어 해가 떴다. 잠깐 잠이 든 것 같았는데 눈을 뜨니 일곱시였다.

어차피 기상 시간이었다. 베란다에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볕이 좋아 빨래를 해야만 하는 날이었다. 한 손으로 배를 움켜쥐고 세탁기로 가서 빨래를 돌렸다. 식사로 토마토를 갈아먹었다. 탄산수는 다시는 안 먹겠다고 다짐했다. 출연이 열흘이나 남은 방송에서 서류를 보내달라고 독촉 전화가 왔다. 책상에 앉아 이메일에 답을 쓰려고 했지만 배가 아파 집중할 수 없었다. 배를 자극하지 않게 빨래를 천천히 널어 햇볕에 말렸다. 그래도 약간은 개운했다.

배를 잡고 누워있었다. 커피를 마시면 장운동이 촉진되어 악성 가스가 배출될 것 같았다. 나는 다시 단추를 적당히 안 잠그고 걸어나가 늘 가던 커피숍에 앉았다. 아이스커피를 마시니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나아진 김에 빨리 이메일 답장을 열 개쯤 썼다. 그럼에도 배는 안 아프지 않았다. 인터넷에 "복부 팽만에 좋은 음식"을 검색했다. 의사로서는 참 부끄러운 검색이라고 생각했다.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계란, 닭가슴살, 요거트, 보리밥, 감자, 바나나 등을 알려주었다. 나는 더 이상 작업을 할 수 없을 것 같아 카페에서 일어났다. 편의점에서 바나나와 닭가슴살과 요거트와 활명수 같은 것들을 실제로 사 와서 집에서 먹었다. 맛도 좋고 몸에도 좋을 것 같았다. 실제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았다.

잠시 뒤 출근해서 밤을 새워야 했다. 어차피 컨디션이 나쁜 채로 출근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사실 수 백 번은 될 것이었다. 오늘도 그처럼 하면 되는 것이다. 진료하는 틈틈이 내일 아침에 있을 강연 자료만 확인하면 되었다. 천천히 몸을 씻고 천천히 걸어서 차에 올라탔다. 응급실에 출근해서 레지던트들에게 반갑게 인사를 했다. "지금 응급실 풀베드고요. 치프 선생님은 아직 점심을 못 먹었고요. 봉합해야 할 환자 두 명이 한참 기다리고 있고요. 밤에는 2년차 선생님이 치프로 데뷔를 합니다." 대충 지금 일이 많고 오늘은 밤새 계속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놀라운 보고는 아니었다. 나는 치프를 불러 어서 밥을 먹고 오라고 한 다음 손가락을 꿰맬 환자를 불렀다. 새우 껍질을 벗기다 다친 환자였다. 다음으로 오토바이를 타던 남자의 팔을 꿰맸다. 살갗이 10센티미터가 넘게 뜯어져 오래도록 꿰매야 했다. 봉합은 순조로웠다. 다 꿰맨 상처를 만족스럽게 10초간 바라보았다. 완벽해.

나는 어느덧 배가 아파 어기적거리면서 걷고 있었다. 늦은 점심을 먹고 돌아온 치프에게 말했다. "내가 가스성 장마비가 있는데 계속 불편하네. 밤에 2년차가 치프인데 어떻게 하지." "검사 안 해봐도 되시겠어요?" "가스만 조금 빠지면 돼." 순간 치프가 내 오른쪽 배를 눌렀다. 몸이 움찔했다. 불길한 징조였다. "엇?" 치프가 의심스러운 눈길로 나를 보았다. "아니야 괜찮아." 나는 순간 둘러댔다. 하지만 복통의 위치가 점차 분명해지고 있었다. 장마비가 아니라 다른 진단의 가능성이 있었다. 확인을 해보는 것이 합리적인 판단일 것이었다. 한 시간쯤 참다가 어쩔 수 없이 응급실 명단에 내 이름을 띄웠다.

마침 내가 일하고 있는 옆방에 CT가 있었다. 책방에서 일하면 책을 쉽게 볼 수 있을 것이고 술집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술을 쉽게 마실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병원에서 일하니 CT를 쉽게 찍을 수 있었다. 책방이나 술집보다는 안 좋을지 몰라도 때에 따라서는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안면 외상 환자가 CT를 찍고 나오자 더 찍을 사람이 없었다. 기회였지만 사실 CT가 조금 무서웠다. 솔직히 조영제 CT를 찍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대신 조영제의 이상한 감각과 부작용은 너무 많이 보고 들었다. 하지만 필요하다면 해야 했다. 나는 인턴에게 절룩이며 다가가서 말했다. "나한테 CT 동의서 좀 받으세요." "네?" "내용은 다 알고 있으니까 그냥 열어만 주세요." 인턴 선생님은 동의서를 열고 사인 공란을 내밀었다. 나는 크게 사인을 하며 말했다. "친절하게 설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CT 실에 전화했다. "제가 아파 CT를 찍으려고 합니다." "지금 오세요." 담당 기사님이 친절하게 맞이해 주었다. "제가 처음이라 잘 부탁드립니다. 부끄럽네요." "아이구 네. 저도 얼마 전에 요로결석이 있어 여기 누웠답니다." 훈훈한 대화였다. 그렇게 수만 명에게 조영제 오더를 낸 의사가 CT 기계에 들어갔다. 전신이 후끈하다가 연이어 아랫도리가 짜릿했다. 수없이 들었던 그 표현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아, 내가 설명하던 것이 이 느낌이구나) 촬영이 끝나자 일어나기 불편할 정도로 배가 아팠다. 자리에 나와서 인계하는 레지던트들 뒤에 서 있었다. 내가 복통 때문에 CT를 촬영했다는 내용이 첫 인계사항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만큼 근무에 중요한 내용이 없기 때문이었다.

여기까지 읽었다면 모두가 검사 결과를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영상을 애타게 기다리던 2년 차가 외쳤다. "아이쿠 압뻬(급성 맹장염)네요." 농담에는 항상 껴드는 1년차가 말했다. "제가 CT를 잘 못 봅니다. 동태눈인데요. 교수님 맹장염은 아주 확연하게 보입니다. 누가 봐도 아주 심하네요." 아닌 게 아니라 내가 봐도 심각했다. "아니 뱃속이 이런데 비를 뚫고 충북 영동에서 강의 두 개를 하고 올라와 달리기 10킬로미터를 한 다음 빨래를 널고 계란과 바나나를 드셨다고요?" "가스가 찬 줄 알았지. 주식도 내렸는데 이것도 견딜 수 있을 줄 알았지." "두 번째는 농담이십니까?" "시끄러."

영상의학과 선생님은 천공 소견까지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터졌다고 했다. "선생님 아주 아프셨을 것 같네요." 레지던트들이 벌써 보호자를 부르라는 둥, 소변줄은 내가 넣겠다는 둥, 자기가 배를 눌러 터뜨렸는데 참 죄송하다는 둥 난리였다. 너무 많은 불행이 있어서 웬만한 질환은 모조리 농담이 되는 직장이었다. 방금 옆방에 CT가 있어서 좋다는 말도 취소해야 했다. 그 결과를 여기 모두가 알 수 있었다. 링거를 달고 다니던 당직 스텝의 맹장이 터졌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잠시 뒤 의국에서 마주친 비서까지도 날 보고 말했다. "어머... 선생님... 맹장 터졌다면서요..."

2.

급성 맹장염은 응급 수술의 적응증이었다.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역시 별다른 이유 없이 배가 이렇게 아플 리가 없었다. 달리기는 잘못된 선택이었다. 또 탄산수는 죄가 없었다. 나중에 한 병 시원하게 마실 것이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상황에 대처해야 했다. 지금은 근무 중이니까 내일 아침에 수술받아야 했다. 삼 일 오프 뒤에 토요일 아침 다시 출근이니까 여유가 있었다. 그 사이에 있는 일정을 취소해야 했다.

내일 오전 강의 담당자에게 전화했다. "제가 방금 맹장이 터졌습니다. 아니 언제 터졌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알았습니다. 수술 때문에 강의를 미루겠습니다. 점심 식사도 다음에, 죄송합니다." 모레 담당자에게도 전화했다. "촬영을 미루겠습니다. 네, 다음 주 며칠쯤이요." 의사가 직접 맹장이 터졌다고 하는데 어쩌겠는가. 일정이 쉽게 조정되었다. 사정을 외과 교수님에게도 전달해야 했다.

응급의학과는 외과 당직과 하루에도 몇 번씩 통화해야 한다. 당연히 환자 관련된 업무 전화였다. 외과 선생님은 냉철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외과 김XX입니다." "응급의학과 남궁인입니다. 저... 제가 배가 아파서 검사했더니, 압뻬 터졌습니다. 지금 응급실 전산에 떠 있습니다. 혹시 수술이 가능할까요." 외과 교수님의 목소리가 극적으로 변했다. 정확히는 업무용 목소리에서 가족과 통화하는 목소리로 변했다. "아이쿠 저런. 선생님. 괜찮으시죠. 제가 수술을 할 수도 있지만. 해당 파트인 대장항문외과 교수님께 말씀드리는 게 더 나을 것 같습니다." "네. 그런데 제가 근무라서 내일 아침에 수술에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교수님은 조금 놀라는 투였다. "언제든 수술받으셔야죠. 일단 말씀을 드려놓겠습니다." 그의 가족용 목소리를 처음 들어본 것 같았다. 굳이 따뜻하게 대화할 이유가 없던 사이였던 것이다. 하여간 크게 마음이 놓였고 벌써부터 고마웠다. 솔직히 귀찮아할까 봐 겁이 났다. 하지만 반대 상황이라면 나 또한 그랬을 것이다.

이제 수술 준비가 남았다. 전산으로 수술전 검사를 냈다. 소변검사와 심전도와 추가 피검사와 굵은 바늘 혈관 확보가 코로나 검사와 등등이 필요했다. 환자 수술을 준비할 때처럼 나에게 처방을 냈다. 검사 결과를 확보한 다음에 퇴원 처리를 해서 전산을 지운 뒤, 내일 아침에 다시 입원 수속을 하면 되었다. 하지만 일어나서 걷기가 힘들 정도로 배가 아팠다. 가끔씩 쏟아지는 복통은 눈을 감고 참아야 했다. 그동안 해온대로 내일 아침까지 버티면 될 것이었다. 잠을 못 잤지만 복통이 끊이지 않아서인지 정신은 명료했다. 열감도 조금씩 있었다. 나는 배를 문지르며 평소보다도 더 근무에 집중하려 애썼다. 몸을 아껴 덜 걸으면서 버텨야 했다. 사정이 있으니 아침에 조금 일찍 퇴근해도 될 것이다. 아침까지는 열두 시간 남았다. 하필 맹장염 전원 문의가 왔다. 흉수가 차는 환자의 전원 문의도 왔다. 나는 일단 모두 수용했다.

당직 중에 맹장이 터졌다는 소문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응급의료센터장님에게 전화가 왔다. "압뻬라면서요. 근무는 바꾸셨나요?" "아니요. 저는 내일 아침까지 근무를 마치고 수술하려고 했습니다." "지금 2년차 치프 근무인데, 아파서 검사받으신 거 아닌가요? 어차피 수술 받아야 하잖아요. 빨리 수술받고 그냥 복귀하는 편이 낫지 않겠어요?" "제가 지금까지 개인적인 사유로 근무를 이탈해 본 적이 없는데. 그냥 열심히 하면 근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현재는 순조롭습니다." "어제도 아파서 못 주무셨다고 들었는데요." "오늘 밤까지 근무하고 수술받은 김에 몰아서 자면 되겠지요." "아니요. 안 될 것 같습니다. 일단 제가 대신 출근하겠습니다."

계속 환자가 오고 있었다. 점점 중증도도 늘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상처를 보러 가기도 불편해서 2년차에게 대신 맡기고 있었다. 의사 생활 13년 동안 한 번도 개인적 사유로 근무지에서 이탈한 적이 없었다. 맹장이 터졌어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통화를 끊고 조금 다르게 생각하려고 애썼다. 욕심만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개인적인 시선을 지워야 했다. 여기가 일반 직장인데 맹장 터진 채로 밤샘 근무를 마치겠다고 했으면 막상 나부터 정신 나간 환자라고 했을 것이었다. 지금 여기가 병원이라서 왜인지 모르게 이 근무가 이상하지 않은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환자 입장에서는 맹장 터진 의사에게 진료받으면 안 되었다. 응급 상황에서 배를 붙들고 걸어오는 당직 스텝이라니. 이것은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는 행위였다. 나는 돌아서야 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질환이었다. 나는 당직을 부탁하기로 결심했다.

대장파트 교수님께 전화를 걸었다. 교수님은 이야기를 전달받은 상태였다. "혹시 오늘 밤에도 빨리 수술이 가능할까요?" "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차피 해야 하니 빨리하고 회복하지요. 병원 근처에 있는데 시간 맞춰 갈 수 있습니다." 나는 그가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나는 교대할 때까지 근무에 충실하려고 애썼다. 중환 구역에서 대동맥류 환자를 보고 나서 돌아섰더니 간호사 선생님이 주사기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선생님 수술전 검사하셔야죠. 환자가 환자를 진료하고 돌아서니 간호사가 환자를 진료한 환자를 진료하는 그런 그림이었다. 링겔을 밀고 자리로 돌아오니 이송 기사님도 딱하게 보는 지경이 되었다.

센터장님이 출근하셨다. 나는 공식적으로 그에게 근무를 양도했다. 너무 송구스러웠다. 링겔을 밀고 환자 구역에 가서 누웠다. 교수라고 적힌 근무복을 벗고 환자복으로 갈아입었다. 몇 계급 강등당하는 군인의 심정 같았다. 심지어 속옷까지 벗고 환자복을 입어야 했다. 그야말로 발가벗은 기분이었다. 사실 여기 누워본 것도 처음이었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내 몸이 병원의 주체가 아니라 객체가 된 것 같았다. 마취과 인턴과 마취과 간호사가 찾아와서 수술에 필요한 조사를 해갔다. 나는 가스를 배출하려고 병원 편의점에서 구운 계란과 요거트를 사 먹은 사실을 고백해야 했다. 진술을 마치자 인턴 선생님이 고백했다. "솔직히 저 교수님 동아리 후배랍니다. 반갑습니다." "어... 어 그래."

그래도 어머니에게는 알려야 했다. 하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아홉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는데. 낮에 수영하고 지쳐서 일찍 잠드신 것 같았다. 보호자를 꼭 부를 필요는 없었지만 웬만한 환자라면 수술을 받을 때 보호자가 같이 올라가지 않는가. 하지만 세 번쯤 전화를 받지 않자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어차피 혼자 살아온 인생이었고 전화할 다른 곳도 없었다. 나는 소지품을 모두 정리해서 의국에 두었다. 입원하러 챙겨온 가방이 아니었지만 책은 한 권 있었다. 수술을 마치고 글을 쓸 수는 없지만 책을 읽을 수는 있었다. 병원이 직장이라서 다행히 생활용품이 몇 개가 비치되어 있었다. 내가 다시 직장에 누웠음을 실감했다. 덜 외롭고 더 부끄러워서 어떤 감각인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처음으로 진통제를 맞았더니 잠이 오기 시작했다.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잠들지 못했다. 커피도 많이 마셨지만 별다른 감각이 없었다. 대신 귀가 활짝 열린 것 같았다. 응급실에서 외치는 말이 모두 생생히 들려왔다. 옆에서 인턴 선생님이 콧줄을 삼키라고 우렁차게 윽박지르고 있었다. 인턴 선생님 목소리가 저렇게 무서웠나. 옆에서는 2년차가 환자에게 설명하고 있었다. 우리 2년차 선생님 참 다정하게 말하는구나. 자꾸 커튼을 걷고 나이트 출근한 간호사들이 찾아왔다. 선생님 아프다길래 보러 왔어요. 반쯤은 호기심에 구경하러 온 것 같았다. 근무 중인 간호사가 배를 면도했고 외과 인턴 선생님이 찾아와서 배에다가 동그라미를 그렸다. 모두들 왜인지 자꾸 환자 확인을 하겠다면서 내 팔목의 팔찌를 보고 이름을 외친 다음에 웃었다. 반응을 해줘야 했는데 농담할 기운이 별로 없었다. 대답해도 별로 안 웃길 것 같았다. 덜 외롭고 많이 부끄러웠다.

수술 담당 교수님도 오셨다. "수술 설명해 드릴까요?" "옆에서 천 번쯤 들었는데 저라고 다르겠습니까." "네. 그러면 잘 하겠습니다. 저는 준비하러 가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런 저런 동의서에 사인을 하면서 졸았더니 수술방 최종 호출이 왔다. "선생님 그럼 수술방으로 가겠습니다." 직장이라 그런지 이송 기사님까지 참 친절했다. 내가 누워있는 침대를 누군가 굴려주는 일도 난생 처음이었다. 말로만 듣던 병원 천장 씬이 지나갔다. 대신 터진 맹장염이 덜컹거리면서 울렸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자 두려운 감정이 앞섰다. 정말 처음이었다. 정맥으로 수면제를 맞거나 전신마취를 당하거나 복강 열림 당하거나 삽관 당하는 것이 모조리 처음이었다. 줄곧 능동적이다가 이번에 수동태가 된다는 것은 대단한 업적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항상 의연했던 내 환자들처럼 나도 잘 해낼 수 있었다.

응급수술이라 대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잠시 후 수술방으로 들어갔다. 이번에도 내 팔찌를 보고 이름을 확인하면서 다들 쾌활했다. 아는 사람의 이름을 다시 확인하는 것이 요식행위 같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당연히 기운이 없어 대답만 했다. 응급실은 수술방과 거의 접점이 없는 수준이었다. 솔직히 나로서는 얼굴을 모르는 의료진들이었지만 대단히 친절했다. 수없이 본대로 나도 수술대로 직접 올라갔다. 꿈틀대서 동그란 베개에 머리를 대라는 말에 다른 환자들처럼 열심히 꿈틀거려서 침대로 올라갔다. 드라마에서 보던 그 뷰였다. 산소 호흡기와 기계 소리와 주사를 넣기 편하게 뻗은 왼팔과 수술방 천장과 밝은 조명. 누군가 내가 마취제를 맞을 것이라고 했다. 수술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낯선 시간이었다. 나는 엄청나게 많은 환자를 재웠다. 대신 나는 항상 깨어 있었다. 잠든 사람의 기억은 그 순간부터 멈추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깨어서 열심히 일해야 한다. 그래야 그 사람은 정해진 처치 후에 깨어날 수 있다. 어느 시점부터 누군가의 시간은 분절되고, 누군가의 시간은 연속하는 것이다. 나는 수십 년간 연속되는 쪽이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내 의지로 잠을 잤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 시간이 주사 한 방으로 분절된다. 남은 사람들이 열심히 일해 나를 깨울 것이다. 두려웠지만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잠드는 것뿐이었다. 잠이 들어야 한다. 의식이 없으면 두려움도 없다. 배는 신뢰하는 내 동료들이 알아서 해 줄 것이...

그 뒤 나는 병실에 와 있었다. 의식적으로 힘차게 기침을 하려고 했고, 누군가 격려하는 것 같았지만, 어느덧 나는 아침 햇살이 쏟아지는 병실 침대에 누워 있었다. 들었던 것보다 목이 아프지 않았다. 분명히 의식이 돌아왔겠지만 나는 병실에 왔다는 자각도 없이 쭉 잠든 것이다. 오랜만에 경험한 깊은 잠이었다. 시간은 아침 일곱시였다. 침대포에는 소독약이 묻어 있었고 배꼽에는 방수 밴드가 붙어 있었다. 구멍 하나로 수술을 하다니 새삼 용하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몸 상태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을 정도였다. 링거를 밀고 응급실로 내려갔다. 전날의 의료진이 그대로 근무하고 있었다. 모두가 나를 무덤에서 걸어나온 사람처럼 보았다. 내가 버텼다면 지금도 저 자리에 앉아 있을 것이다. 나는 수술하고 한숨 자고 왔다고 인사한 뒤 당직실에서 칫솔로 이를 닦았다. 그리고 책과 핸드폰을 가지고 올라갔다.

핸드폰을 열어보니 어머니가 수술했냐고 문자를 보내놓았다. 다시 전화하니 받지 않았다. 두 번째 전화해도 안 받았다. 나중에 알아보니 어차피 아들은 수술을 받았을 것이고 어찌 됐든 할 수 없는 일이 없는데 수영을 안 가면 손해니 갔다고 했다. 매주 수요일은 오리발로 수영하는 날인데 안 가면 아쉬웠다고. 오리발로 발차기를 하면 얼마나 빨리 나가는지 아냐고, 접영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아냐고 하셨다. 나라도 그럴 것 같았다. 인정하는 부분이었다. 역시 어머니는 나를 낳은 분이셨다.

올라가서 책을 읽다가 다시 잠들었다. 첫 입원 생활이었는데, 왜 사람들이 병동에 친절 편지를 쓰는지 깨달았다. 혈압과 체온을 재주는 간호사 선생님이 너무 감사했다. 빨리 수술해 준 외과 선생님과 마취과 선생님도 감사했다. 깨어나니 춥지 않게 담요와 포가 딱 알맞게 덮여 있었다. 자는 동안 발끝의 보온에 대단히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응급실 의료진이 무엇을 했는지 잘 생각나지 않았다. 다 아는 사람이라서 그런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적어도 하루 정도는 입원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간호사 선생님이 와서 교수님이 오늘 퇴원해도 된다고 했다. 나는 "오히려 좋아"를 외쳤다. 언제 퇴원해도 되냐고 하니 대략 낮 2시라고 했다. 그럼 빨리 가겠다고 했다. 교수님은 미리 처방까지 내주셨다.

수술받느라 확인하지 못했던 미국 주식이 올라 있었다. 이렇게 오르는건 처음 보았다. 뭐든 내가 안 봐야 좋은 결과가 나온다. 책을 읽다 점심(연식)을 받아먹고 퇴원했다. 체감상 환자식은 직원식보다 몇 배 나았다. 다행이었다. 나는 평소에 환자들이 직원식당 밥 같이 치명적인 물질을 먹는 줄 알았다. 퇴원 약도 병실에서 바로 받을 수 있어 편리했다. 옷을 다 갈아입고 짐을 챙겨 내려가 응급실에서 손을 흔들었다. 바뀐 치프가 쾌활하게 인사하는 나를 보고 입원 환자가 저렇게 빨리 퇴원하는 건 처음 봤다고 했다. 솔직히 나도 처음 봤다. 하지만 집에서 앓는 편이 더 편했다. 나는 주차하는 직원분들에게 맹장 수술을 하느라 조금 차가 늦게 나간다고 죄송하다고 했다. 다들 웃으면서 걱정해 주셨다. 그대로 운전해서 집에 돌아왔다. 수술 받은지 열 네 시간 만이었다. 근무를 하러 갔다가 졸지에 수술을 받고 돌아온 것이다.

내 집은 그대로 있었다. 세면하고 옷을 갈아입고 잠에 들었다. 일어나 잘 마른 빨래를 걷고 퇴원하면서 사 온 죽을 대단히 많이 먹었다. 하루 정도는 배가 당기고 열감이 있어 일어나기 힘들었다. 하지만 다음 날은 집 밖에 나가서 커피를 사 마시고 국밥을 사 먹을 정도가 되었다. 국밥집 사장님에게 36시간 전 맹장 수술받은 사람이 일부러 먹으러 나올 정도니 자랑스러워하셔도 된다고 했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그다음 날이다. 내일은 아주 가뿐하게 출근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글로 나는 이제 휴가 동안 해야 할 일을 마쳤다. 남은 시간은 우영우를 몰아서 볼 것이다. 모두 안녕. 미리 쾌유를 빌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압빼도 직원할인될까요???

출처 : https://www.clien.net/service/board/park/17425705?type=recomm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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