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객이 잘 안 가는 진정한 공포 비르케나우 수용소 뒤...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나치의 홀로코스트의 핵심 시설 중 하나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아우슈비츠 박물관을 주로 보고 비르케나우는 생략하거나 간단히 보고 마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갔을 때도 아우슈비츠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아침일찍이나 저녁시간 말고는 미리 예약한 단체관람객만 받고 소지품 검사까지 받아야 했지만, 비르케나우는 매우 한산해서 입장권 있는 것만 확인하면 바로 들여보냈습니다.
그 이유는 비르케나우(아우슈비츠 2) 는 거의 다 파괴되어서 남은 게 거의 없기 때문이죠. 가스실은 다이너마이트로 파괴해서 폐허만 남아 있고, 수용소는 남동쪽 1/4-1/5만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까지 찾아오는 사람들은 유대인 단체관람객이 많습니다.유대인에게는 매우 중요한 장소이다보니 그냥 아무렇게나 관람하지 않고, 저렇게 이스라엘 국기를 뒤에 매달고 엄숙하게 랍비의 설명을 들으며 추모의식을 거친 다음 경건하게 관람하는 것 같았습니다. 매년 봄에는 산 자들의 행진(march of the living)을 한다고 합니다. 가끔은 이스라엘 총리도 참석한다고 하네요. 원래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1940년경에 폴란드인을 주로 수용했는데, 소련 침공 이후 소련군 포로를 대량 수용하기 위해 1941년-1942년에 아우슈비츠 2 (비르케나우) 수용소를 새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소련군 포로가 밀려들자 "자리를 만들려고" 소련인과 폴란드인을 아우슈비츠 1 수용소 건물 지하에서 시안화수소 (그 유명한 치클론 B)를 이용해 학살했죠. 그 유용성(?) 을 알게 된 나치는 아우슈비츠 1 수용소 옆에 가스실을 지어서 수천 명을 학살하다가 여기 비르케나우에 거대 가스실을 여러 개 만들어서 본격적인 가스실 학살을 벌이게 됩니다. 1944년 말 소련군이 폴란드까지 밀고 들어오자 SS 총수 하인리히 힘러는 11월 1-2일에서야 학살 중지를 명령하고 11월 25일에 수용소의 화장장(Crematorium)과 가스실의 파괴를 명령합니다. 그리고 수용소가 해방된 날인 1월 27일의 열흘 전인 1월 17일이 되어서야 수용소를 폐쇄하고 사람들을 오스트리아와 독일에 위치한 수용소로 끌고 가는 죽음의 행진을 시키죠. 그리고 소련군이 이 수용소를 접수하기 직전인 1월 20일에 가스실 두개를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하고, 23일에 Kanada(우리가 아는 그 캐나다가 맞습니다)라고 불린 압류품 보관 창고를 불태운 다음, 접수 전날인 1월 26일에 가스실 하나를 폭파합니다. 창고는 5일 동안이나 탔다고 하네요.즉, 나치가 최후의 순간까지 어떻게든 숨기고 증거를 인멸하려고 발버둥친 곳은 우리가 많이 가는 아우슈비츠 1이 아니라 바로 여기, 그 중에서도 가스실과 화장터 같은 곳이었죠. 그 이유는 아우슈비츠 1은 노동수용소에 가까웠지만 (물론 가스실이 있었습니다) 비르케나우는 절멸수용소에 가깝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치는 사람들을 극한까지 착취하는 노둥수용소는 독일 오스트리아 같은 본토에도 많이 만들고 점령지에서도 그렇게까지 숨기려고 노력하지 않았으나, 베우제츠, 소비보르, 트레블링카 같은 절멸수용소는 독일 본토가 아닌 폴란드 땅에만 건설하고 어떻게든 숨기며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철저히 노력했습니다. 즉, 우리들은 아우슈비츠 박물관을 가서 나치의 잔학함에 전율하지만, 사실 박물관이 위치한 아우슈비츠 1 수용소는 가스실도 있고 수용소 사령부도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최악의 수용소가 아니었기 때문에" 증거인멸 우선순위에도 밀려서 남은 것도 많고 생존자도 많아서 이야기할것도 많고 박물관으로 쓰일 정도로 건물도 튼튼해서 관광객이 많이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사망자가 훨씬 더 많았던 비르케나우 수용소 같은 곳은 대다수 도착 즉시 가스실에 끌려들어가고 시체도 전부 불에 태워져서 남은 게 없기 때문에 생존자가 별로 없고 증거도 거의 다 인멸되고 그나마 남은 건물들도 가축 축사에 가까우니 볼게 많지 않아서 사람들이 많이 오지 않습니다. (99.99%가 사망한 트레블링카 같은 절멸수용소는 더하고...)1945년 1월 27일 소련군이 수용소를 해방할 당시에는 저렇게 지금은 많이 깔끔해져 있었습니다.수용소 중간쯤에 저런 건물이 있는데요, 이 공터가 바로 화차를 타고 온 사람들을 노동 가능인원과 불가능 인원으로 분류한 곳입니다.노동 가능인원이 되면 저 안쪽에 위치한 가축 축사와 비슷하게 생긴 건물에 수용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이것도 1943년쯤까지 이야기고 1943년 소비보르, 헤움노, 트레블링카 같은 다른 라인하르트 절멸수용소가 폐쇄되고 1944년이 되어 헝가리와 이탈리아에서 수많은 유대인이 밀려들어오게 되자 (남는 자리가 없으니) 그냥 분류작업 없이 도착 즉시 학살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끔찍하게도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아트 슈피겔만의 "쥐" 로 폴란드 유대인의 고난에 대해 잘 알수 있지만 헝가리 유대인은 어떤 고난을 겪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수용소 인원 뒤쪽에 있었던 문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감시초소 또한 그대로 보이네요..
아우슈비츠를 상징하는 유명한 사진이 찍힌 그 곳이죠....이 화차는 추모의 의미로 기증된 것이라고 하네요..
바로 이런 사진이 찍힌 곳입니다..조금 더 걸어가면 아우슈비츠를 상징하는 가스실이 나옵니다. 사실 이 가스실이 유명한 이유는 소련군 진입 직전에 폭파하느라 흔적을 완전히 없애지 못해서 증거가 많이 남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가스실은 기초 부분을 제외하고는 흔적을 지워버리는 데 성공해서 볼 게 없어서 관광객이 없습니다.
이 가스실이 공장식 학살의 최종 단계입니다. 한 건물에 탈의실, 가스실, 화장장에 수처리시설까지 갖추고 있습니다.저런 화장장까지 갖춰 놓고 있었다고 합니다.초기에 나치는 따로 학살전문부대(아인자츠그루펜)을 편성해서 총살했는데요.. 전쟁중에 귀한 총알을 낭비할 수 없었고 병사들이 고통을 호소하는데다가 어떤 병사는 사람 죽이는 장면을 사진찍어서 보관하거나 집에다 보내 자랑하기까지 하니깐 조용히 몰래 학살하기 위해 만든 게 가스실이었습니다. 초반에는 가스 트럭 뒤에다가 사람을 몰아넣고 배기가스를 집어넣어서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학살하다가(헤움노), 이왕 이럴거면 전용 건물을 만드는게 좋으니 목재 가건물을 만들었고(베우제츠), 가건물이 밀폐가 잘 안되니 튼튼한 콘크리트 건물로 바꿨으며 (소비보르), 마지막에는 튼튼하고 커다란 건물을 만들고 전체 구조도 사람들이 생각을 제대로 못하도록 만들었죠. (트레블링카)그냥 들어가라고 하면 당연히 저항할테니깐 가스실을 샤워실로 속이고 여긴 일하기 전 위생검사를 하기 위해 잠시 들르는 곳이라고 말하게 해서 희생자를 안심시켰습니다. 처음에는 SS가 말했는데 그럼 당연히 의심할 테니깐 유대인을 시키는 것으로 바꿨죠.. 하필 샤워실로 속인 이유는 자발적으로 옷을 벗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나중에 옷을 벗기면 번거로우니깐요.. 이 모든 과정은 존더코만도가 담당했는데, 아트 슈피겔만의 "쥐"에 소개된 증언에 따르면, 시체는 주로 유일한 탈출구인 문 앞에 많이 모여 있었는데 희생자들은 살려고 안간힘을 쓰는 과정에서 가장 위에는 힘센 남자가 있었고 그 아래로 약한 노인이나 아이들이 아래에 깔려 있었으며, 살려고 발버둥치다가 팔이 탈구되어 자기 키만큼 팔이 늘어난 시체도 있었다고 합니다.
몇십 분 지나면 존더코만도가 시체를 끌어내어서 바로 옆에 있는 화장장에 시체를 넣었는데, 한 번에 몇구를 넣어서 처리했기 때문에 학살효율이 꽤 높았습니다. 사실 그것도 적게 죽일 때 이야기고, 나중에 헝가리나 이탈리아에서 유대인이 많이 실려왔을때는 구덩이에 시체를 넣고 불을 지르는 방법으로 처리했다고 합니다.. 으으
지금은 바람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곳이 되었습니다.주요 시설은 전부 다 지하에 있어서 이 모든 과정이 밖에서는 조용히 처리될 수 있었습니다. 탈의실부터 화장장까지 전부 다.오른쪽 계단이 바로 들어가면 다시는 나올 수 없는 문이었습니다.바로 옆에는 이곳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언어로 추모비를 세워 두었습니다.보통 여기서 관람을 끝내게 되죠. 그 뒤는 거의 다 터만 남아 있으니깐요.그런데 진짜는 바로 뒤편에 남아 있습니다. 관광객이 아무도 없어 조용하기 그지없는 들판 말입니다.바로 나치가 최우선적으로 증거를 인멸하려고 노력한 곳이 바로 여기기 때문이죠. 진짜는 저런 수처리시설부터 시작됩니다.저런 평범한 의자에도 다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절멸수용소에서 바로 저런 식으로 시신을 태웠기 때문이죠. 화장장이 따로 없거나 충분하지 않은 경우에는 저런 식으로 임시 화장장을 만들어서 아래에 불을 붙여서 처리했다고 합니다.저렇게 구덩이를 파고 시체를 쌓아두고 불을 질러서 처리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이 길도 사실은 아주 무서운 진실이 숨어 있죠..이 길은 가스실로 가기 직전 마지막에 걸었던 길이기도 하고 시체를 불에 태우기 위해 싣고 가던 길이기도 하며 시체를 다 태우고 남은 재를 싣고 가던 길이기도 합니다.
길 왼쪽은 그냥 숲 같지만
사실 가스실에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대기하던 곳입니다.....저기는 탈의실 건물이 있던 곳인데 증거를 완벽하게 인멸하느라 철저하게 파괴해서 설명을 듣기 전에는 무엇인지 알기 힘듭니다.그러니깐 멀리 있는 숲에서 대기하다가 저 노란색 풀이 자라고 있는 곳에서 옷을 벗게 되는 것입니다.건물은 철저히 파괴했지만 이상하게 기단만은 남아 있습니다.여기는 가스실이 있던 곳인데, 초기 형태라서 따로 화장장이 없었고 바로 뒤에 보이는 공터에서 바로 화장했습니다.뒤쪽 들판이 바로 야외 화장장입니다. 아예 임시 선로까지 가설한 다음에 철저하게 모든 것을 불에 태워버렸는데, 수용소 해방 한참 전에 증거인멸을 위해 모든 것을 철저하게 파괴해서 거의 남은 게 없습니다. 여기야말로 수용소의 핵심 중의 핵심인데 말입니다....처음에는 화장하고 남은 재를 여기서 1km 정도 떨어진 강에다가 흩뿌리거나 건축 자재나 퇴비로 썼는데, 나중에는 시체가 너무 많으니 화장터 근처에 뿌리거나 숲 근처에 묻어버렸다고 합니다.그러니깐 이 들판은 최소 1백만명이 넘는 아우슈비츠 희생자의 거대한 영묘나 다름없습니다.이 모든 게 말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x_od2YfftD4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 나오는 시체 태우는 장면이 주로 벌어진 곳이 바로 여기입니다.다시 수용소 쪽으로 잠깐 걸어가면 가스실 겸 화장장 IV (Crematorium IV) 가 보이는데요, 여기는 1944년 10월 7일 존더코만도가 아우슈비츠 봉기를 일으켰던 곳입니다. 이들은 밀반입한 무기로 화장장을 폭파하는 데 성공했으나 봉기는 신속하게 진압되고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그 이후로 여기는 버려졌고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영화 사울의 아들이 이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https://youtu.be/B3_r7qxHqVo
사울의 아들 예고편그리고 왼쪽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또 다른 들판이 보입니다.1944년 모 존더코만도가 몰래 찍은 그 유명한 사진이 찍힌 곳이 여기입니다.들판에는 구덩이가 여럿 남아 있는데바로 이런 일을 하고 재를 묻은 곳이라서 그렇습니다.낙엽이 잿빛이군요..그냥 보면 조용한 숲인데 말입니다..여기저기에 회색 흙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혹시 돌가루인가 싶어서 만져봤는데 일반적인 돌가루와 달리 밀가루와 비슷하게 점성이 느껴졌습니다.
.......땅에 묻은 재도 개미, 두더지 등이 파해쳐서 지상으로 올라오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았습니다.저기 연못이 바로 재를 뿌린 곳이라고 합니다.그런데 직접 가 보면 연못 뿐만 아니라 화장장은 물론 들판 어디를 가든 재가 넘쳐납니다. 너무 많아서 수습이 안 되는 건가 싶을 정도입니다.도저히 오래 있을 수가 없어서 정문 쪽으로 걸어갔습니다.일부 막사는 개방하고 있었습니다.
수용소 해방 직전 나치는 막사 상당수를 불에 태워버리는 데 성공해서, 지금은 들판 위에 굴뚝만이 기괴하게 남아 있습니다.가보시면 왜 나치가 아우슈비츠 중에서도 왜 거기만은 어떻게든 감추려고 들었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모르고 가면 그냥 평화로운 공원이지만 알고 가면 정말 무서운 곳이니 마음 단단히 먹고 가시는 것을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