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여자 친구 썰
당시는 내 생일이었다.
생일 시작과 함께 식중독이 찾아왔고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당시 나는 아무에게도 내 생일을 말하지 않았고
전 여자 친구도 오롯이 간호를 위해 방문했다.
그녀의 간호 덕분인지 시간이 지나며 진정되었고
그녀는 집안을 청소해 주기 시작했다.
소파를 다 빼고 청소기를 돌리다가
볼펜 자국을 보고 티슈에 물을 묻혀 닦고 있다.
베란다에서 카페트를 털고 널고 있다.
마지막으로 대걸레질까지...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으나
이제 모든 방의 청소가 시작..
화장실 수전, 유리, 거울에 묻은 물때를 제거한다.
(변기 사진 주의)
변기를 청소할 때 좀 놀랐는데
스펀지에 세제를 묻히고
바로 맨손으로 물 속에 넣어서 관을 닦더라.
부모님이 생일이라고 30만원을 보내 주셨는데
동료들에게 회식을 사라고 주신 돈..
하지만 식중독에 고생하고 있던 나에게
곁에 있는 건 그녀 뿐이었고
부모님께는 죄송하지만
그냥 데이트를 위해 쓰기로 결심한다.
갑자기 외식하자는 말에 그녀는 싱글벙글해 했고
한식당으로 데려가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기선 모든 게 비싸니까 밖에서 생수를 사오잰다.
괜찮다면서 앉히고 음식을 주문했는데
전생에 한국 사람이었는지 너무 맛있게 먹더라.
점원을 불러 공깃밥과 김치를 추가 결제하는데
그 사실도 모르고 바쁘게 먹는다.
그리고 계산을 하는데
지갑에 있는 모든 현금을 나에게 주었다.
(그래봤자 나온 금액의 반이 안 된다..)
그 돈을 그대로 집어서
엉덩이 뒷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그리고 씩 웃으며 내 카드로 결제하니
영문도 모르고 놀란다.
훗.. 아버지 감사합니다.
이 생일만큼은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ㅜ
연차 휴가를 쓰고 그녀와 좀 더 있기로 결심한다.
아침부터 밤까지 생일을 한 사람을 위해 쓰는구나.
우리는 부두를 거닐었고..
저녁이 되자 그녀는
같이 할머니 집에 가겠냐고 내게 물어 보았다.
그녀의 가족을 대면하는 건 처음이었기에 긴장이 되었다.
하지만 당장 우리 가족도 나의 연애 사실을 모르는데
믿고 제안을 한다는 게 고마웠다.
할머니 댁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그녀에게 물었다.
"러시아어 표현 좀 가르쳐 줘.."
그녀는 잠시 뇌 정지가 왔고
이윽고 인삿말을 가르치려고 하였으나
도통 따라하기가 어려웠다.
"아..! 예쁘다랑 맛있다가 러시아어로 뭐야?"
할머니는 매우 온화하신 분으로
베란다에는 토마토와 장미가
예쁘게 자라고 있었고
집안 분위기를 알 수 있었다.
"예쁘다랑 맛있다가 러시아어로 뭐야?"
이유는 모르겠으나 당장 급한 표현으로
난 이 2개를 뽑았다.
짧으니까 왠지 외울 수 있을 것 같았다.
할머니는 계속해서 음식을 내 오셨고
그녀의 손녀를 왜 좋아하는지 물으셨는데
한국어였으면 온갖 살을 붙이면서
그녀의 성품과 내면의 아름다움을
칭송했겠지만..
"예뻐(서요)"라고 러시아어로 말해버렸다.
그런데 할머니의 반응이 이상했고
역시 외적인 아름다움은 별로인 건가..
이렇게 난 속물이 되어 버렸군..
라고 생각하던 찰나
모르고 "맛있다"라고 말한 걸 깨달았다.
아니 아니 아니
예뻐서 예뻐서요라고 급하기 정정하니
여자 친구가 폭소하면서
뭐라고 러시아어로 설명을 하는데
할머니가 크게 웃으시면서
답변이 마음에 든다고 좋아하셨다.
이후로 음식은 끊이지 않고 나왔고
"맛있다"만큼은 평생 잊을 수 없게 되었다.
지금도 러시아어로 "맛있다"를 말하면
그때 생각에 서로 웃음이 나온다.
출처 :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dcbest&no=111282&_dcbest=1&page=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