ㅇㅎ) 13명을 자살하게 만든 페르시아 최고의 미녀과 그 진실
아마 인터넷 짬밥이 좀 되는 펨붕이들이라면 익숙할 위 사진의 여성은
보통 인터넷에서 페르시아의 "타지 공주" 로 알려져 있어
그리고 조금 더 기억력이 좋거나 이런 류의 썰들을 좋아하는 펨붕이들이라면 아마
위 사진과 함께 그녀가 아름다운 외모로 유명하여 구혼자만 무려 145명에 달했고,
그중 13명은 공주의 거절을 받아들이지 못해 자살까지 했다는 이야기까지도 같이 들었을거야
하지만 "타지 공주" 의 외형적인 특징들은
솔직히 우리가 아는 미인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회의적인 사람들은 "ㅅㅂ 이거 포도 아님?" 하는 생각이 들기 마련이였고
해당 게시물들은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페르시아의 미의 기준이
현재와 다르게 풍만한 몸매와 큰 얼굴, 그리고 누구보다 짙은 눈썹에 콧수염을 선호했다는
설명을 덧붙여야 했지
넷상에서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미의 기준이 변화한다" 의 예시로도 자주 인용되기도 한 사례지만
믿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인데...
"ㅋㅋ 포도즐"
"아니 상식적으로 말이 됨? 145명이 구혼하고 13명이 자살해?
이게 미국이 구애하고 중국이 눈치보고 일본이 전전긍긍한다는거랑 뭐가 다름?"
(씹팩트네)
뭐 솔직히 글쓴이도 동의하는 부분이긴 하다.
그러니 뭐가 삼겹이고 뭐가 포도인지,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빠르게 알아보도록 하자
나시르 앗 딘 샤>
일단 첫 번째로 놀라운 점은
인터넷에 "타지 공주" 의 사진이라고 퍼진 사진들의 주인공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는 사실이야 ㄷㄷ
그들의 정체는
1855년생 “Esmat al-Dowleh” 공주와 1884년생 “Taj al-Saltaneh" 공주로,
나이차가 거진 30살인 것부터 포도 냄새가 진하게 나는 부분이지...
이 둘은 치세 초기 근대화를 추구하며 계몽군주의 면모를 보였지만
이후 근대화를 포기하고 담배 전매권 등을 영국에 넘겨버린
이란 카자르 왕조의 나시르 앗 딘 샤, 혹은 나스레딘 샤의 딸들이였는데
나시르 앗 딘 샤 본인이 페르시아 최초의 사진가로 꼽힐 정도로 사진에 관심이 많았어서
딸인 그녀들의 사진 또한 덩달아 많이 남았다고
“Esmat al-Dowleh”>이후 그녀는 홀로 사진을 찍거나 프랑스인 선생에게서 자수와 피아노를 배우고
여러 유럽권 국가들의 외교관들의 부인들과 궁정에서 사교의 장을 여는 등
교양있는 왕가의 둘째딸로서 아버지를 보좌했다고 함
아무래도 백 몇명이 구애하고 십수명이 전전긍긍한 절세 미녀의 인생과는 거리가 먼데...
“그렇다면 그녀의 이복동생이자 나시르 앗 딘의 12번째 딸
"진짜" 타지 공주는 정말로 145명에게 구애받았을까?
아쉽게도 "진짜" 타지 공주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아.
다만 당대의 왕족 여성으로서는 굉장히 놀랍게도 두 번의 이혼을 했고,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책을 썼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지
해당 서적은 여성 인권에 관하여 이란 여성이 쓴 최초의 글로도 알려져 있어
(절대 구글에 Crowning Anguish: Memoirs of a Persian Princess from the Harem to Modernity 를 검색하지마!)
"아! 페르시아의 여인들은 사람들에게서 밀려나 가축과 짐승들 사이에 놓여있다. 그들은 필생(必生)을 감옥에서 영위하며, 쓰라린 이상 아래 깔려 고통받는다."
"내 성(性)이 해방되고 이 나라가 진보하게 되는 날이 오면 나는 기꺼이 해방의 전장에 내 몸을 바치고, 자유를 사랑하며 권리를 주장하는 동료들의 발 밑에 자유로이 내 피를 뿌리리라"
여성 인권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던 타지 공주는
이란의 여성 인권 운동의 선구자로 여성 자유 연대를 조직했으며
무려 1936년 생활고에 시달리다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이란의 민주주의와 인권향상을 위해 노력했다고 전해짐
(에휴 시발)
실연의 아픔 끝에 스스로 생을 마감한 여러 구혼자들의 이야기가 포도라고 해도
19세기 당시 이란인 - 페르시아인 - 들의 미적 기준이
기존 게시물들의 설명과 유사했던 건 놀랍게도 사실이 맞다 ㄷㄷ
위 그림은 19세기에 그려진, 이란 여성을 묘사한 그림인데
보다시피 풍만한 배, 짙은 눈썹 등이 자세하게 묘사된 걸 볼 수 있어
다만 콧수염에 관련해서는
여자들이 콧수염을 제모하지 않은 것,
그리고 (여성 특성상 엷은 솜털같은) 콧수염이 있으면 좋다고 생각되었던 것 은 사실이지만
수염이 없다고 흠은 아니였고 진하게 보이려고 칠하지도 않았음
이는 여성이 남성과 닮고 남성이 여성을 닮은 걸 선호했던 페르시아 문화의 영향이였고
서양의 미적 기준이 유입되기 시작하며 빠르게 사라졌다고 함
결론적으로,
1. 19세기 페르시아 사람들이 풍만한 몸매와 큰 얼굴, 그리고 짙은 눈썹 (+@옅은 콧수염)
3. 따라서 19세기 페르시아 사람들의 미적 기준 때문에 "타지 공주" 가 최고의 미인이였다는 건 FALSE
평생을 이란의 인권향상에 바친 인권운동가
기구하게도 21세기 인터넷에서는 30살 많은 이복언니와 퓨전돼서 페르시아의 미적 기준을 상징하는 밈이 되어버린
타칭 "타지 공주" 에 대해서 알아보았음
물론 19세기 이란 - 페르시아 - 의 미적 기준이 솔직히 우리 관점에서 웃긴 건 사실이지만
훌륭한 삶을 산 공주들도 기억해주는게 어떨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재밌었음 추천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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