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질결심 후기(스포有)
헤어질결심을 보고 나왔는데 여운이 길어 마음속으로 계속 되내어 보게 되더군요..
떠오르는 생각들을 개인적으로 스케치해보다 좀 길어져서 사용기에 한번 남겨봅니다.
개인 소장용 독후감이라 지극히 주관적이고 음슴체로 썼으니 양해바랍니다. 그리고 반박 시 님의 말이 맞습니다..ㅎ
0. 사랑은 당연하게도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남녀 간 사이에 놓인 수많은 것들이 의심을 만들고 머리로도 사랑을 판단하게 한다. 즉 사랑에 마음뿐만 아니라 머리의 이성적 사고가 동시에 작용하는 것이다.
명확한 사랑이 어떤 말이나 행동, 의심들로 인해 안개처럼 흐려지는 것을 자주 목격한다. 그럴 땐 우리 머리가 내려주는 판단을 중시해야 할까 아니면 우리의 마음을 더 믿어봐야 할까. 해답이 없는 질문이고 어쩌면 나 자신을 붕괴시킬 만큼 위험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이 작품을 보며 사랑이 어떠한 의혹으로 흐려질 때 과연 마음으로 얼마나 포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이 들었다. 이런 논점으로 인해 사랑을 머리로 접근한 남자와 마음으로 받아들인 여자의 타이밍이 어긋나 결국 영원히 ‘미결’된 사랑으로 남게 되는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로 느껴졌다.
1. 인물과 줄거리
해준은 원칙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으로 사건을 해결하고 미재 사건에 집착하는 사람이다. 다소 강박적이고 결벽증적인 성향도 보인다. 이런 이성적인 자아상의 인물이 살인범인 서래에게 본능적으로 끌리면서 내적 갈등을 겪게 된다. 범인이 아닌 줄 알았던 서래가 살인범임을 본인만이 알게 되자 충격을 받고 혼란스러워하다가 결국 증거를 인멸하라고(폰을 바다에 빠뜨려라) 말하고 서래를 떠나게 된다. 평소처럼 ‘이성’적 판단이 아닌 ‘마음’이 시킨 데로 한 결정이지만 자신의 원칙에 어긋나 이는 결국 해준을 ‘붕괴’시키고 그 마음을 스스로 끝내는 결정을 한다.
서래는 극 중에서 안개처럼 모호한 사람으로 나온다. 치밀한 계획을 세우며 범행을 함과 동시에 주변 사람에게 있어 호감을 형성하는 옴므파탈적 여인이다. 그녀의 행적은 계획 살인범이지만 선의와 매력에 둘러 쌓여져 있어 그녀의 본질은 안개처럼 애매모호하다. 그녀가 범행을 했는지 아니면 선한 사람인지 알수 없는 모호함은 해준의 오감, 특히 눈을 통해 받아들이는 진실을 흐릿하게 만드는 본질적인 이유이고 그녀에게 집착하게 하여 해준의 마음을 뒤흔드는 출발점이 된다.
그녀는 마음이 시키는 대로 삶을 살아왔다. 할머니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안락사를 시켰고 자신에 대한 소유욕에 집착하는 기도수를 계획적으로 살해했다. 수단이야 어찌 됐든 선의라고 생각되는 마음의 소리를 행동으로 옮기는 여성이다. 살인범이 맞지만 선의로 가지고 행동한 그 마음만 놓고 보면 나쁘다고 할 수 있을까.
자기 주변을 멤 돌며 감시하는 해준이 용의자 신분인 자신에게 왠지 모르게 잘해주는 것에 조금씩 끌린다. 해준이 자신의 원칙까지 저버리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증거를 인멸하라고 하자 큰 울림으로 서래는 사랑에 빠지게 된다. 해준은 스스로 붕괴되어 떠났지만 그 희생에 사랑을 느껴 서래의 사랑은 시작된 것이다.
13개월 후 서래는 새로운 남편을 맞았지만 치정관계에 얽혀있는 삶에 진저리가 나있는 상태다. 삶의 유일한 낙은 유일하게 ‘마음으로 자신을 사랑’한 해준의 목소리 녹음파일을 듣는 것이다. 극단으로 치닫는 현재의 삶에 회의를 느끼며 안개도시 이포에서 모든 것을 끝낼 계획을 세운다. 얼마 후 새 남편이 처참하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여기에 다시 서래는 살인 용의자가 된다. 진범은 다른 사람이었지만 이건 서래에 의해 유도된 것이었는데 사실 이것은 자신이 해준 몰래 녹음한 파일이 세상에 드러나 부적절한 관계로 밝혀져 위기에 처할 수도 있는 해준을 위한 것이었다. 또한 첫 번째 살인사건의 핵심 증거를 바다에 빠뜨리지 않고 다시 해준에게 주며 다시 사건의 결말을 진실대로 되돌리고 붕괴된 자신을 되찾으라고 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두 번째 사건의 증거와 함께 누구도 알 수 없는 바다에 묻히며 사라진다.
2. 산과 바다
산과 바다라는 소재가 주는 공간감이 영화를 가로지른다. 산은 높고 위태롭고 아슬아슬하며 바다는 넓고 아늑하고 포용적이다.
산의 위험한 절벽을 오를 때 정신(이성)을 바짝 차려야 하며 내가 디딘 자리를 항시 의심하고 확인해야 한다. 이런 수직적 위기감이란 성격에서 보면 산은 의심과 확인을 상징하는 소재로 볼 수 있다. 모든 물건에 자기의 이름을 새기며 소유하는 것에 집착하는 기도수와 수사하는 데 있어 강박이 있는 해준처럼 둘은 산의 이러한 측면을 닮아있다. 소유와 강박은 기본적으로 의심에서 출발하는 것이니 말이다. 따라서 나에게 이 영화에서 산이 의미하는 건 이런 이성적이고 의심적인 측면의 위태로운 사랑을 암시하는 소재로 느껴졌다.
사랑에 있어 의심이란 절벽처럼 얼마나 아슬아슬한 단면인가. 그래선지 영화에서 유독 해준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장면이 많은데 표정이 항상 위태롭다. 나의 판단이 잘못되면 아래로 붕괴되어 추락할지도 몰라서 그런 걸까. 질곡동사건에서 범인이 자살하고 아래로 떨어지는데 그것을 옥상에서 물끄러미 쳐다보는 장면이 그래서 인상적이다. 감옥에 가기를 죽기보다 싫어하지만 그 가치관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던져버린 홍산호의 비극적인 죽음을 보며 어쩌며 해준은 홍산오처럼 자신의 이성과 가치관을 버렸을 때 똑같이 추락하는 건 아닌지 불안해하며 자신의 운명을 암시했을 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바다에서 끝이 난다. 바다는 범죄의 증거를 인멸하는 곳이자 둘만의 비밀(사건의 결정적 증거)이 보관되는 공간이고 해준이 상상 속에서 해파리처럼 부유하며 안정을 얻고 꿀잠을 자는 공간이다. 서래는 해준에게 호흡법을 알려주며 해파리가 되어 오감을 받아들이는 눈코입에 의존하지 말고 오로지 마음으로 세상을 받아들이라고 한다. 또한 해준의 심장(마음)을 가지고 싶어 한다. 즉 이리적 판단보다는 조건 없이 포용하는 마음과 조건 없는 사랑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이는 해준이 자신에게 쓰는 마음 그 자체로 흔들린 서래와 닮아있다. 서래는 스시를 시켜주고 자신을 위해 밥을 해주며 심지어 자신을 붕괴시켜가면서까지 지켜주는 해준의 마음 그 자체만을 본다.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라는 격언을 쓰며 산보다 바다를 좋아한다는 서래는 위태로운 해준과는 달리 항상 표정에 여유가 있다. 모든 현상을 잊고 바다에서 같이 부유하고자하는 사랑으로 남고 싶었던 건 지도 모르겠다.
3. 눈과 안개
우리는 눈코입 등의 오감을 통해 세상을 인지한다. 특히 눈으로 많은 정보를 받아들인다. 눈을 통해 들어오는 세상이 과연 진실 된 것일까. 안개가 끼어 사물이 흐리게 보이거나 멀리 있어 코트 색이 파랑 혹은 녹색처럼 보이는 것처럼 눈은 때론 진실을 왜곡한다. 원칙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인 해준은 사건에 대한 집착과 강박으로 불면증 앓고 있고 이로 인한 항상 뻑뻑한 눈 때문에 사건이 왜곡되어 보이지 않을까 걱정돼 안약을 넣고 사건을 명확하게 바라보려 한다. 감정에 흔들리지 않고 이성의 끈을 놓지 않는 산처럼 흔들림 없이 세상을 보려 하는 것에 집착한다.
죽는 자는 눈을 뜨고 죽는 경우가 많단다. 산자와 죽은 자의 차이는 뭘까. 똑같이 눈을 뜨고 있음에도 죽은 자는 세상과 진실을 볼 수 없다. 살아서도 세상을 똑바로 보지 못한다면 죽은 자와 차이가 없다. 세상을 눈을 통해 판단하고 이성적 사고하는데 몰두하는 해준에게 있어 눈은 살아있다는 반증이며 존재 그 자체이다.
그래서 해준은 눈과 귀를 통해 들어오는 서래의 정보로 그녀를 받아들이며 사랑을 시작한다. 망원경을 통해 그녀의 삶을 관음 하며 에어팟을 통해 그녀의 정보를 받아들인다. 그녀가 범인이 아님을 스스로 입증해 나가며 서서히 의심을 거두고 마음을 그녀에게 연다. 하지만 서래가 범인임을 알게 되는 순간 자신의 자아와 사랑하는 마음 사이에서 큰 균일이 생기고 붕괴되고 만 것이다. 이후 해준은 더 큰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게 되고 서래를 만나 조금씩 나아지던 불면증도 더 심해지게 된다.
우리가 눈을 통해 바라보는 현상, 특히 사랑이 안개처럼 흐려져 의심으로 가득 찰 때 과연 우리는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결국 이 영화에서는 해준의 눈과 안개를 통해 이런 질문을 넌지시 던지는게 아닐까.
4. 붕괴 그리고 미결이지만 영원한 사랑
사건 해결에 대한 자신의 삶을 관통하던 가치관과 범죄자를 사랑한다는 배척되는 감정 사이에서 방황하던 해준의 이성은 결국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범인인 서래를 놓아주고 붕괴돼 버리고 만다. 서래는 해준이 꼿꼿한 그 가치관을 무너뜨릴 만큼 마음이 크다는 걸 붕괴됐다는 말로 인지를 하고 그의 사랑의 크기를 느낀다. ‘나는 붕괴되었어요’라는 해준의 말이 해준에겐 이별을 고하는 말이었지만, 서래에게는 사랑의 시작으로 느껴진 것이다. 후반부에 해준은 사랑했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고 의아해하고 붕괴라는 말을 사랑한다는 말로 받아들인 서래의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주는데, 세상을 바라보는 도구가(이성과 마음) 달라 서로 사랑을 인지하는 시점이 미묘하게 어긋나 있음에 씁쓸함을 느낀다.
서래는 결국 휴대폰을 돌려주며 자신이 범인이라는 증거로 삼아 해준에게 다시 일어서라고 말했다. 아무도 모르는 바다에 묻히며 스스로 미결 사건으로 남기로 결심한다. 시차와 유부남, 이루어질 수 없는 현실이기에 해준의 원칙을 다시 살려주고 꼬여버린 자신의 삶은 끝나도 마음만을 영원히 남기고자 하는 선택을 한다.
해준은 미결 사건에 집착할 것이고 그렇게 서래의 마음은 영원히 해준에게 남겨질 것이다. 미결과 미완성이지만 영원한 사랑으로 남는 것이다. 한 남성의 마음속에 파괴적으로 영원히 각인을 새긴 체로 말이다.
많은 영화들이 미완의 사랑 이야기를 풀어냈었다. 하지만 이런 붕괴와 미결이라는 표현법으로 그려낸 방식이 대단히 독창적이었다. 기존 박찬욱 감독 영화처럼 피와 살점이 튀진 않지만 옴므파탈인 서래가 한 남자를 처절히 붕괴시키고 사랑을 각인시키는 과정이 정서적으로 대단히 파괴적인 그런 영화였다. 특히 마지막 라스트 신에서 바다에 묻히며 자신을 영원히 해준에게 미결의 사랑으로 남기는 그 선택은 아직까지도 그 몰아치는 바다의 파도처럼 격정적인 여운으로 남아있다.
보는 시각에 따라 여러 가지 의미로 바라볼 수 있고 영화 내에 나오는 거의 모든 소재에 관해 의미를 곱씹어 볼 수 있을 만큼 소재 배치가 세련된 작품이었다는 것도 좋았다. 2회차를 보게 만드는 영화란 이런 작품이 아닐까.
ps. 애플워치와 에어팟
영화 내 소재와 대사들이 다시금 곱씹어 볼 만큼 배치와 얽힘이 정말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옷이나 벽지 등의 색 사용도 역시나 좋다.
애플워치 녹음과 에어팟 등 시기를 그대로 반영해 줄 수 있는 소재들이 영화의 중요 소재로 쓰인 것도 재미있다. 이런 요즘 시대의 기믹으로 표현되는 박찬욱식 알콩달콩 사랑 표현과 나아가 중요 사건에도 연결되는 중요 소재로 사용된 게 참신하게 다가왔다. 수 십 년 뒤 이 명작 영화를 다시 본다면 그때는 아날로그 소재가 잘 쓰였다는 레퍼런스로 남을 거 같다.
출처 : https://www.clien.net/service/board/use/17431035?type=recomm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