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 히로부미가 한국 강제병합으로 돌아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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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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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겨찾기 / RSS 구독 / 11월 17일(일)
을사늑약 이후 한국통감부가 들어서고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부임함
나라의 주권을 빼앗으려는 마수에 반발한 한국인들은
의병전쟁을 일으키면서 일본과 맞서 싸움
1906년~1911년까지 일본이 기록한 의병과의 교전횟수만 해도 1852건
그중 사망자가 17,779명, 참가자 수가 141,818명이었다고 하니
한국인들의 반발이 얼마나 거셌는지 짐작할수 있음
이에 고심하던 이토 히로부미는 1909년 당시 황제였던 순종을 시켜
서북 지방, 남부 지방을 순행하는 작업을 기획함
순행을 기획한 이유는 한국민들의 반발을 잠재우고
통감부가 황제를 이렇게 잘 보좌하고 있다-라는 걸 과시하기 위해서였음
그렇게 1909년 1월 7일부터 1월 12일까지 대구, 부산, 마산을 순행하는 남순행을
1월 27일부터 2월 3일까지 평양, 의주, 정주, 개성 등을 보는 서북순행을 시행함
그런데 이 순행은 이토의 뜻과는 전혀 반대로 돌아가기 시작함
순행의 본래 목적은 통감부와 일본에 대한 우호적인 감정을 조성하기 위해서였는데
정작 한국 국민들은 황제를 환영하면서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공공연히 드러냈던 것
대표적으로 남순행 때 순종이 마산항에서 일본 군함 아츠마(吾妻) 호를 승선하려 하니까
5~6척의 나룻배를 나눠 탄 마산 주민들이 황제를 향해서
"폐하가 일본에 간다면 우리는 바다에 뛰어들어 죽을 것이다. 임금이 포로가 되는 걸 ㅂㅈ 못하겠다"
고 외친 일이 있었음
또 순종이 순행하는 고을마다 역대 충신, 임진왜란 영웅들에게 제사를 올렸고
서북순행 때는 단군, 기자, 동명성왕, 을지문덕의 사당에서 제례가 열렸음
당연하게도 이런 제사는 이토가 전혀 기획하지 않았던 것
순행하는 순종을 맞으러 나온 사람 수도 매우 많아서
마산에서 1만, 의주에서 1만 5천, 개성 일대에서 10만의 인파가 몰렸을 정도였음
원래대로라면 연도의 환영 인파들은 태극기와 일장기를 함께 흔들어야 했지만
일장기를 거부하고 태극기만 드는 사람들이 많아 통감부가 매우 곤혹스러워 했다고
이렇게 사람들이 황제를 열렬히 지지하면서 일본을 적대하니까
이토는 통감부 정책이 실패했음을 깨닫고 강제 병합 찬성 쪽으로 돌아서게 됨
그렇게 통감직을 사임하고 일본으로 돌아간 게 순행 바로 직후인 1909년 2월 8일의 일이었음
이씨 왕가가 독립을 위해 일을 잘 했다 못했다와는 별개로
이토가 통감직을 때려칠 정도로
그때 한국인들의 독립 의지가 강했다는걸 알수 있는 일화임
출처 : https://m.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66028136